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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야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인 1918년 러시아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동유럽 국가의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폴란드, 발트3国 등 러시아 영방 내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 주권국가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고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조국을 세우고자 했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민중들도 이 조약에 고무돼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독일군의 지원을 받은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이 1918년 3월 25일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3월 25일은 '자유의 날'이라는 이름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지요 문제는 벨라루스의 뒷배를 봐준 독일이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1919년 1월, 러시아가 다시 벨라루스를 침공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국기도 이 무렵 소련의 영향을 받아 붉게 바뀌었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벨라루스도 다시 독립공화국으로 재출발했고 그에 따라 백-적-백의 국기도 다시 회복하게 됐습니다 다만 원래의 3월 25일은 국경일로 되살아나지 못하고 대신 벨라루스 의회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7월 27일이 새로운 독립기념일로 지정됐지요 이는 폴란드, 발트3国, 헝가리 等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 공산化 되기 이전의 국경일을 다시 재채택한 것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이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 이후 초대 벨라루스 대통령이자 현직 대통령(...)인 루카셴코가 국민투표로 개헌안을 밀어붙이면서 독립기념일을 7월 3일로 바꿔버리고 맙니다 이 7월 3일은 1944년 소련 붉은군대에 의해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가 해방된 날이었습니다 벨라루스 독립 이후에도 이날은 민스크 市民의 날로 남아 있었는데 이날을 국가적인 명절로 격상시키면서 루카셴코 본인의 친러 노선을 강화하는 기념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백-적-백의 국기도 소련 시절의 국기에서 낫과 망치만 빠진 깃발로 다시 환원되기에 이르렀지요 (...) 오늘날 벨라루스인들의 원래 독립일인 3월 25일은 루카셴코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파 세력에 의해 기념되고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독립과 건국의 기쁨을 노래하는 날이라기보다는 反독재, 민주화를 부르짖는 저항의 날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해외에 거주중인 벨라루스 교민들은 퍼레이드라던가 종교 행사와 같은 의례를 통해 3월 25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폴란드의 11월 11일, 헝가리의 3월 15일 等 원래의 명절을 되찾은 여타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벨라루스는 100년이 지나도록 원래 독립일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 기념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도 1920년부터 임시정부에 의해 3.1절 경축행사가 시작됐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46년에 가서야 공식적인 식전이 치러졌지요
이상해요 2022.07.29 추천 1 조회 89229
(전편 : https://www.jbc.ne.kr/bbs/world?mod=document&pageid=1&uid=578 1932년 6월 24일, 프리디 빠놈용과 쁠랙 피분송크람 등 혁명적 지식인과 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한 '시암 혁명'이 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무능한 전제군주정에 대항해 입헌민주주의 정체를 세우고 태국을 민주국가로 변혁하기 위해 엘리트 계층이 주도한 혁명이었지요 이 혁명으로 전제군주정 태국에도 민주헌법이 제정되고, 혁명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의회가 개설되는 등 나름의 성과를 맛보게 되었습니다만 (입헌 이후 태국 3대 총리를 역임한 쁠랙 피분송크람)(1938-1944, 1948-1957) 혁명 주도자였던 프리디 빠놈용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안이 군부의 반발을 샀고, 그와 함께 혁명을 이끌었던 청년 장교 쁠랙 피분송크람이 빠놈용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 1938년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총리에 오른 쁠랙 피분송크람은 1938년 7월, 각료회의의 투표를 걸쳐 혁명이 일어난 6월 24일을 '태국 국경일'로 정할 것을 발표했고, 국가경축일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로 태국의 민주화(?)를 기념할 것을 각계각층에 요구했습니다 1939년 첫 국경일 기념 당시 태국의 한 신문에 보도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각회의는올해 6월 24일 국경일과 헌법 개정 성공을 축하하는 소식을 전했다. 총리는 국경일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 부처에 명령을 내렸는데, 수행해야 할 임무에 관한 지시는 다음과 같다. 국방부 1. 오후에 사남 루앙에서 열병식을 거행한다 2. 청년 병사를 조직해 야간에 횃불 퍼레이드를 벌인다 3. 주간에 항공기를 동원해 축하의 색종이를 뿌린다. 밤에는 불꽃놀이를 전개한다 4. 정오에 육해공 포병이 축하의 예포를 쏜다 법무부 1. 모든 행정구에서 국경일의 의미를 전하는 학생회를 조직한다 2. 불교, 그리고 정부에서 공인한 여타 종교의 기념 의례를 거행한다 3. 미술단체를 조직해 야간에 기념 연극을 펼친다 4. 야간 횃불 행진 동안 청년 군인들이 부를 애국 노래 경연 대회를 개최한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로 국경일 밤 라디오 방송에서 송출한다 5. 국경일에 집을 장식할 국기를 제작해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한다 실내 디자인 협회 1. 각 행정구역의 장관들로 하여금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명령한다 2. Ratchadamnoen Road 양쪽의 덤불을 따라 전기 장식을 설치한다. 파루스완 궁전 앞에서 사남루앙 주변까지 전구를 단다. 3. 국경일 저녁에 기념 예능 공연을 펼친다 4. 국경일 정오에 1분 동안 모든 자동차로 하여금 경적을 울리도록 한다. 단, 병원 주변이나 도로에서는 울리지 않도록 한다 경제부 다양한 종류의 국경일 경축 우표를 발행한다 1939년 6월 24일 열린 첫 국경일의 모습은 그야말로 경축일색이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전국 각지의 불교 사원에서 종을 울리고, 차량은 경적 소리를 냈으며, 시민들은 뿔나팔을 불고 군인들은 예포를 쏘았습니다. 거리는 태국 국기와 국기를 상징하는 색깔의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됐습니다. (1) 첫 국경일을 기념하는 플로트카 (2) 국경일을 기념해 행진하는 소년소녀단의 모습 (3) 국경일 기념 열병식에서 위용을 드러내는 전차 (4) 청년 군인들의 횃불 퍼레이드 오후에는 오색조화와 각종 장식으로 다채롭게 꾸며진 플로트카가 가장행렬단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고, 경찰과 육해공군, 소년단의 열병식이 성대하게 거행됐습니다 밤에는 청년 군인들이 횃불을 들고 대로에 도열했으며,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애국적인 가요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아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1940년 6월 24일에는...
이상해요 2022.07.26 추천 1 조회 88386
덴마크의 국경일은 6월 5일 제헌절입니다 덴마크의 모든 국가공휴일 中 유일하게 종교적 색채가 없는 세속 휴일이지요 1849년 덴마크의 첫 헌법 제정, 1915년 여성 참정권 개헌, 그리고 1953년 현행 헌법 제정이 모두 6월 5일에 열렸기 때문에, 이날은 덴마크 헌정사를 기념, 경축하는 국가경축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성대한 국기 퍼레이드로 국경일을 축하하는 노르웨이, 열병식 등으로 국경일을 기념하는 프랑스, 이태리 等 유럽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덴마크의 제헌절은 이날을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 전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19세기에 그려진 제헌절 기념 그림엽서를 보면 교회에서 사람들끼리 모여 민요와 덴마크 국가를 부르고 공원이나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며 피크닉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오늘날 덴마크의 제헌절 또한 특별한 의식 없이 가족이나 친구끼리 공원이나 명소에 나가 맥주를 마시고 케이크나 핫도그를 먹으며 피크닉을 즐기고 또는 교회나 거리 등지에서 정치인들의 기념 연설이나 민요, 국가 연주를 듣는 것이 고작이라고 합니다 물론 명색이 '국경일'인 만큼 국기를 게양하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와 같이 온 거리를 십자가기로 물들이는 광경은 보기 드물다고 하는군요 심지어 1891년부터 1975년까지는 법정 공휴일도 아니어서 그저 노동자들은 반나절 휴가만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31년 제정된 덴마크 아버지의 날(역시 반나절의 휴가가 주어짐)이 원래 11월 둘째 주 일요일에서 1949년 6월 5일로 옮겨지면서 실질적으로 덴마크인은 6월 5일 제헌절 하루 동안을 휴일로 쉴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과거 2차 대전 이전까지는 국왕의 생일을 국가적인 축일로 경축하면서 가가호호 국기도 내걸고 군악대와 근위병의 시가행진도 있는 등 나름 성대한 규모로 국경일 행사가 열린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덴마크에서 국왕의 탄신은 공휴일이 아니라 그저 평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은 국민적 축일인 제헌절은 세상에서 가장 밋밋하고 평범한 공휴일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해요 2022.07.03 추천 2 조회 88255
어제 1일은 홍콩이 중공으로 반환된 지 25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25주년 기념일은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및 애국자치항(愛國者治港) 원칙에 따라 친중공 정치인의 대의활동만 허용된 상황에서 치러지는 행사여서 중국 공산당 체제의 견고함을 과시하는 장으로 됐습니다 (홍콩 반환 25주년을 기념해 열린 버스 퍼레이드. 버스에 현수막과 오성홍기, 홍콩 깃발을 장식했다) 오전에는 우중에 홍콩 경찰 의장대의 사열 속에 국기 게양식이 거행됐고 그 외 각지에서 민관합동으로 버스 퍼레이드, 전시회, 퍼포먼스 등 갖가지 행사가 개최됐습니다 (반환 25주년 기념 어선 퍼레이드. 어선에 각종 깃발과 오성홍기를 게양했다) 주요 빌딩에는 홍콩 반환 25주년을 기념하는 포스터와 현수막이 게재됐고 노면전차와 택시도 반환 25주년 기념 도색을 입힌 채 운행에 들어갔습니다 해상에서는 오성홍기와 홍콩 자치구기로 장식된 어선이 해상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J3Tr5uEQzc 야경을 배경으로 다채로운 조명과 음악을 연출하는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도 반환 25주년을 기념하는 테마로 개최됐으며 (TVB 영상 비공개되어 RTHK 영상 시청바랍니다. https://www.rthk.hk/tv/dtt32/programme/25ahksar_varietyshow/episode/824294 - 2023년 7월 31일 14:00 서버 이전과정에서 반영) TVB는 반중보수 성향의 대표 주자였던 과거를 무색하게 하듯 반환 25주년을 기념하는 예술제를 생중계했습니다 다만 1일 오전에 열린 국기 게양식은 태풍 주의보가 발효된 가운데 비바람으로 참가자들의 의복이 휘날리는 상황 속에서 개최됐습니다 어찌 보면 '홍콩의 앞날에 바람 잘 일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편 CCTV는 6월 30일 신문연파에서 사설을 통해 "일국양제는 일국의 기치가 잘 보존됐을 때 양제가 더욱 빛을 발한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가 날로 교묘해지고 언론의 자유가 유명무실해지는 가운데 기존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당의 통제가 거의 없는 서구식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양제'의 원칙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해요 2022.07.02 추천 2 조회 88045
1. 당시 히틀러 경례는 '독일 민족의 인사법'으로 불리며, 독일 국민은 일상에서의 모든 인사를 '히틀러 만세'로 대신해 부를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우편 배달부들도 히틀러 만세를, 백화점 종업원들도 직원을 접대할 때 '히틀러 만세!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인사해야 했을 정도였지요 다만 기존의 '구텐 탁'과 같은 독일어 인사가 여전히 널리 사용됐는지, 나치당 정부는 주요 관공서와 기차역, 전봇대 등에 "독일 민족의 인사법 : 하일, 히틀러!" 라고 적힌 홍보 판넬을 붙여 홍보했다고 합니다   2. 원래 히틀러 경례는 오른팔을 높이 뻗어 올린 자세로 "하일, 히틀러!" 라고 외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었지만 오른팔을 절반 정도 구부린 채 뒤로 젖히는 자세 또한 히틀러 경례로서 인정됐습니다 이는 팔을 뻗기 힘든 상이용사들이 경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생각해 낸 대안이었다고 하는데, 굳이 상이용사가 아니더라도 경례를 받는 사람이나 또는 팔을 뻗을 공간이 부족할 때 저런 식의 경례를 대신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원래 히틀러 경례는 공무원 사이에서 먼저 도입됐습니다 1933년 7월 나치당을 유일 정당으로 선포하기 하루 전날, 히틀러 정부 내무부에서는 모든 공무원들로 하여금 독일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나치당 당가)가 연주되는 동안 팔을 뻗어 경례를 해야 하고, 인사 또한 "하일, 히틀러!"로 대신해야 한다는 법률을 발표했습니다 나치 경례를 하지 않은 공무원들에게는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라는 경고성 메세지도 함께 발표됐는데요 이후 공무원들은 물론 나치정권으로부터 낙인 찍힐 것을 두려워 한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히틀러 경례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히틀러 경례를 보급하려던 히틀러 정부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면서 급속도로 보급됐다고 합니다     4. 독일 어린이들은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히틀러 경례를 배웠고, 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에도 하루에 여러 차례 히틀러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치원에서는 도시락통을 팔에 걸고 어느 정도 높이까지 팔을 뻗어야 하는지를 직접 가르쳤다고 하며, 학교에서는 수업을 시작할 때와 마쳤을 때, 그리고 성인을 마주칠 때마다 히틀러식 경례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MecO38MZCc 5. 나치 독일에는 <파울 닙코 TV>(Paul Nipkow TV)라고 불리는 텔레비전 방송이 존재했습니다. 파울 닙코는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텔레비전 기술자였는데, 그의 이름을 따 나치당 산하에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치한 것입니다 위 영상은 당시 방송자료 중 일부인데, 오프닝 사인과 클로징 사인 때마다 아나운서가 나와 히틀러 경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는 2번 단락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팔을 구부려 하는 경례를 취했습니다   6. 다만 나치 경례가 일상 속의 의례로 널리 스며든 것과는 별개로 독일 국민들의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문학가 빅터 클렘베러가 1941년에 쓴 일기 중에는 "예전에는 히틀러 만세! 라고 인사했을 노동자들이 다시 '구텐 탁' 하며 원래 독일어 인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이러한 전통으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2차 대전을 겪으며 히틀러에게서 민심을 돌린 다수 독일인들이 히틀러 경례를 그만 두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 총통이 자살한...
이상해요 2022.06.28 추천 2 조회 88099
오늘날 태국의 국경일은 12월 5일 '아버지의 날'입니다 이날은 선대 태국 국왕인 라마 9세의 탄신을 기념하는 날인데요 국왕을 '생불'(生仏)로 섬기며 존경하는 태국답게, 라마9세 대왕의 생신을 '아버지의 날'로 지정해 국가 최대의 기념일로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마 9세 대왕의 생일이 태국의 범국민적인 축일로 승화된 것은 1960년부터의 일로 이는 라마 9세가 즉위한 1946년으로부터 14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까지 태국의 국경일은 언제였냐고요? 바로 6월 24일 '혁명기념일'이었습니다 본래 태국은 1932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제군주국가였습니다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이었으며 동시에 태국 왕실의 수장이었습니다 내각의 주요 인물들도 민간인이 아닌 왕실 구성원으로 채워졌을 정도였지요 당시 태국의 국왕은 라마 7세였는데 그가 즉위한 1925년, 태국의 국고는 파탄 직전에까지 이르렀고 라마 4세, 5세 시절 국외로 유학 간 엘리트 계층의 자제들은 절대군주제의 벽 앞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라마 7세는 정부의 기능을 효율화한다는 명목으로 선대 국왕이 임명한 장관 12명 중 3명만을 남기고 모두 물갈이 하는 한편 정부 부처에 소속된 공무원을 대거 감축해 이들을 거리로 나앉게 했었습니다 이렇게 후진적인 정치제도를 갖고 있던 태국에서도 서구에서와 같이 의회를 개설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높은 문맹율과 사회제반시설의 부족으로 번번히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인, 외교관 7명이 모여 회동을 갖습니다. 그중에는 법학도인 쁘리디 바놈용(사진 왼쪽)과 포병 대위 출신의 쁠렉 피분송크람(사진 오른쪽)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국의 민주화를 기도하고 전제왕정을 무너뜨려 서구와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카나랏사돈>(태국 인민당)을 조직하고, 태국 내부에 실업 공무원과 군인, 지식인층을 규합해 혁명을 추동할 세력으로 조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태국을 민주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고안해냈습니다.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 태국의 문맹율이 대단히 높고, 국민교육이 제대로 보편화되지 않아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민중혁명 형식의 민주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결국 군대와 엘리트가 결탁해 '위로부터의 개혁',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32년 6월 24일, 혁명선언문을 낭독하는 군인들) 그리고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가 태국에까지 닥치면서 태국 경제 또란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됐습니다 디플레이션으로 물가가 하락해 세수가 급감했고, 국방예산까지 감축되는 바람에 군 장성의 진급 또한 연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제적 혼란 속에서 금본위제까지 포기한 태국은 정부 예산 규모를 3분의 1로 줄이고, 그만큼 공무원과 정부 직원을 대거 해고해 실업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더욱이 쿠데타가 일어난 1932년은 태국 왕조 개창 150주년이 되던 해로, 민간에서는 이 해에 뱀의 저주가 닥쳐 왕조가 멸망할 것이라는 미신이 널리 퍼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32년 6월 23일, 라마 7세가 별장에 휴가를 떠난 틈을 타 인민당 혁명지도자들은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왕궁 앞에 도열한 태국 군인들의 모습) 6월 24일 새벽, 군부측 대표이자 왕실 근위대 장교 출신인 피분 송크람이 이끄는 군대가 탱크를 몰고 왕궁과 주요 관공서를 포위했고 정부 관료들을 일제히 체포했습니다. 쁘리디 바놈용의...
이상해요 2022.06.23 추천 1 조회 87747
https://www.youtube.com/watch?v=lf4E26FrAKM 아시다시피 홍콩은 1997년 이전까지 영국령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홍콩 주민들은 스스로를 '영국 국적을 가진 중국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1960~80년대 홍콩은 10월 즈음으로 해서 갖가지 국경일 장식으로 다채롭게 치장됐다고 합니다 중화민국을 지지하는 홍콩 주민들이 대다수였기에 대개 손문과 장개석, 장경국 총통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청천백일만지홍기로 건물이 장식되곤 했습니다만 특이하게도 중공의 10.1 국경절을 기념하는 홍콩 주민들도 소수 있었습니다 기념은 주로 홍콩에 파견된 중공 출신 근로자들과 연락원, 그리고 당시 홍콩 최대 노동조합이었던 공회연합회(工會聯合會) 주도로 이뤄졌는데 오성홍기와 모택동 초상화가 내걸리고, 유화국화(裕華國貨)와 같은 중공 상품전시장에서는 중공 건국 이래의 업적을 찬양하는 쇼윈도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여성 피복근로자 노동조합이 내건 중공 국경절 축하 간판 그림에 모택동 얼굴을 덧댄 모습이 매우 이질적입니다 모택동이 저렇게 몸이 건장할 리가 없어 홍콩 좌파 영화인들의 중공 건국기념일 연회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10.1 국경절은 홍콩의 공휴일로 지정됐는데 중국 본토와는 달리 10월 1일 단 하루만 휴일입니다 코로나19 이전까지는 홍콩 깃발과 오성홍기 게양식이 열리고 밤에는 불꽃축제를 펼치는 식으로 이날을 기념했다고 하는데, 2019년 홍콩 민주항쟁과 코로나19를 거치며 불꽃축제는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사그라들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공의 통제정책에 항거하는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홍콩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었지요. 그때가 기묘하게도 중공 수립 70주년 기념일과 맞닿아 있었는데, 당시 중공 매체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기 동안 국경절을 기념한 소수 홍콩인의 사례를 끌고 와서 "홍콩인들은 식민지 동안에도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다"(...)라는 둥, "과거의 이런 모습과 비교했을 때 오늘날 소수 홍콩 과격분자들의 활동은 보기 민망하다"(...)라는 둥, 당의 선전 정책에 노골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근데 2019년 홍콩 지방의회 선거에서 친중공 세력이 득표한 표가 30%대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이건 왜 애써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 그래서 선거제도를 바꿨구나     + 여담으로 1997년 이후에도 자유중국의 10.10 쌍십절 행사는 일국양제라는 명목 하에 일부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개최되었는데, 홍콩 민주항쟁 이후로는 당국의 감시가 삼엄해져 더 이상의 행사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이상해요 2022.06.16 추천 2 조회 87274
짤은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 - 1월 1일 영웅 추도 기념일 - 부활절 다섯 번 째 전 일요일 (2월~3월 언저리) 성 금요일 (Good Friday) 부활절 월요일 (Easter Monday) 총통 생일 - 4월 20일 (...) 의외로 1939년 50세 생일 때만 공휴일로 지정됐고 그 외엔 평일이었습니다 독일 국민의 국경일 - 5월 1일 원래는 국가노동절이었지요 주님 승천 대축일 오순절 월요일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 제국 추수감사절 - 9월 29일 이후 첫 일요일 종교개혁기념일 - 10월 31일 순국열사 추념일 - 11월 9일 이날은 1923년 나치당의 맥주홀 폭동이 실패한 날입니다(...) 기도와 회개의 날 - 11월 23일 전 수요일 성탄절 전날, 성탄절, 성탄절 익일 (12.24~12.26)   그 외 국기 게양일로는 1월 18일 - 독일 제국 건국기념일 (1871년 독일이 처음으로 통일된 날) 1월 30일 - 민족 봉기의 날 이날은 히틀러가 1933년 총리에 취임한 날입니다(...) 부활절 다섯 번째 전 일요일 - 영웅 추도 기념일 4월 20일 - 총통 생일(...) 5월 1일 - 독일 국민의 국경일 9월 29일 이후 첫 일요일 - 추수감사절 11월 9일 - 순국열사 추념일 반란군을 순국열사로 기념하는 모습이 굉장합니다 그 외 국가기념일로는 2월 24일 - 나치당 창립 기념일 5월 둘째 일요일 - 어머니의 날 6월 21일 - 하지 9월 상반기 -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 12월 21일 - 동지 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의외로 히틀러 취임일이나 나치당 창당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띄는 대목은 히틀러의 생일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이 1939년 50세 생일 때 뿐이란 건데 여담으로 북한에서 태양절(...)로 기념하는 김일성 생일도 1962년 50세 생일을 계기로 처음 공휴일로 지정된 역사가 있습니다(...)
이상해요 2022.06.11 추천 0 조회 87389
10 라이히마르크 - 알브레히트 테어 (독일의 농업과학자. <농업의 원리>라는 책을 저술. 최초의 농학교인 테어스 가든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20 라이히마르크 - 베르너 지멘스 (전기도금법을 개발해 전선을 개발. 지멘스 AG의 창업자. 최초의 전기철도 개발자) 50 라이히마르크 - 데이비드 한제만 (프로이센의 재무장관이자 자유주의 정치인) 100 라이히마르크 - 유스투스 폰 리비히 (화학자. 탄소 및 수소 원소분석 방법을 발전시킴. 비료에서 질소가 중요한 역할을 해냄을 규명) 1000 라이히마르크 -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 (고전주의 건축가) 이렇게 화폐에 이공계 위인을 많이 집어넣고 돈에 자국의 지도자 초상을 새기지 않은 나라는 다름 아닌.... ??? : 지크 하일!!!! 놀랍게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이었습니다(...) 여담으로 동전(단위는 페니히. 1, 2, 5 마르크 주화가 있었음)에는 2마르크, 5마르크에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히틀러(...)는 아니고 독일제국 3대 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933년 1월 30일, 대통령 비상대권을 발해 나치당 당수 히틀러를 제국수상으로 임명한 이가 바로 힌덴부르크인데, 1934년 사망 후 2마르크, 5마르크 주화에 그의 초상이 새겨졌습니다. 당시 5마르크의 가치는 어지간한 근로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그 가치가 실로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나치 시기 독일에서 히틀러 초상화는 저작권(...)이 걸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문이나 우표, 기타 포스터 등에 히틀러의 초상화를 사용하면 그만큼 로열티를 지급해야 했다는 소리죠(돈독이 올라도 어지간히 올랐네요) 아마 히틀러의 초상화를 화폐에 새겼으면, 유통되는 화폐 금액만큼 로열티를 물리려고 또 화폐를 찍어내고, 또 그렇게 찍어낸 화폐의 초상화 로열티를 마련하려고 또 화폐를 발행하는, 그래서 인플레를 유발하는 효과를 낳을까 두려워서 그랫던 건지는 잘 모르겟습니다
이상해요 2022.06.10 추천 0 조회 86953